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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 인사이트] “유통·건설 ‘흐림’ vs 반도체·방산·조선 ‘맑음’”…10년새 달라진 재계 판도

유통·건설 중심 시대 저물고 방산·AI·조선이 새 주역으로
사드·코로나·전쟁 거치며 그룹 순위와 시장 평가도 재편
“누가 더 컸나보다 누가 살아남았나”…재계 보는 기준 변화

[서울타임즈뉴스 = 최남주 기자] 한때 재계의 힘은 소비 경기와 함께 움직였다. 백화점 점포가 늘어나면 유통그룹 외형도 커졌고 해외 건설 수주가 이어지면 건설사 위상도 덩달아 올라갔다. 백화점과 대형마트는 공격적으로 점포를 늘렸고 건설사들은 해외 플랜트와 중동 사업으로 외형 경쟁을 벌였다. 2010년대 중반은 더 많은 점포와 더 큰 건설 프로젝트가 곧 그룹 경쟁력으로 받아들여지던 시기였다.

 

재계 순위 역시 내수 소비와 부동산 경기 흐름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당시 재계를 움직인 축은 유통과 건설, 정유, 철강, 물류였다. 하지만 최근 재계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시장 중심에는 백화점 대신 AI 반도체 공장이 들어섰고, 건설 현장보다 방산 생산라인과 조선소 도크가 더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동안 침체 산업으로 밀려났던 조선업은 다시 살아났고 AI 반도체와 방산은 그룹 위상을 바꾸는 핵심 산업으로 떠올랐다.

 

공정거래위윈회가 매년 발표하는 재계 순위표를 들여다보면 이같은 변화는 금새 알 수 있다. 2016년 공정위의 재계 순위는 삼성과 현대자동차, SK, LG에 이어 롯데와 포스코, GS, 현대중공업, 한진, 한국전력 등이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10년이 흐른 2026년의 재계 순위는 삼성과 SK, 현대자동차, LG에 이어 한화가 5위에 올라섰다. 롯데와 포스코, HD현대, 농협, GS가 뒤를 이었다.

 

오랫동안 이어졌던 ‘삼성·현대차·SK·LG·롯데’ 중심 구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재계 5위로 올라선 한화그룹의 위상 변화는 최근 새판짜기이 돌입한 재계 현주소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과거 한화는 화학과 금융 중심 그룹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최근 시장은 한화를 방산과 조선, 에너지 중심 기업으로 바라본다.

 

유럽과 중동을 중심으로 군비 확대 움직임이 이어지면서 한화에어로스페이스를 중심으로 한 방산 사업 가치가 빠르게 커졌고 조선과 에너지 사업도 함께 재평가받고 있다. HD현대도 달라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조선업은 대표적인 침체 산업으로 분류됐다. 하지만 LNG선과 친환경 선박 수요가 살아나면서 시장 분위기도 바뀌었다. 여기에 AI 데이터센터 확대와 함께 전력기기 수요까지 늘어나면서 HD현대일렉트릭을 중심으로 그룹 가치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반면 과거 재계 성장의 중심축이었던 유통과 건설업은 새로운 고민을 안게 됐다. 온라인 소비 확산과 내수 둔화 속에서 유통기업들은 성장 정체 부담에 직면했고 건설업계 역시 부동산 경기 침체와 자금시장 경색이라는 이중 압박을 받고 있다. 시장에서는 “돈이 움직이는 방향 자체가 달라졌다”는 말도 나온다. 과거에는 소비와 내수 시장이 그룹 몸집을 키웠다면 이제는 공급망과 기술 경쟁력, 글로벌 대응 능력이 순위를 바꾸는 시대가 됐다.

 

재계 변곡점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건은 2016년 사드(THAAD) 갈등이다. 중국의 한한령 이후 면세와 유통, 화장품 업종은 예상보다 훨씬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중국 시장은 국내 기업들의 핵심 성장 기반이었다. 중국 관광객이 몰려들었고 유통과 화장품 기업들은 중국 소비 확대 흐름에 맞춰 공격적으로 외형을 키웠다.

 

하지만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중국 관광객 발길이 줄었고 현지 사업 불확실성도 커졌다. 롯데그룹은 중국 사업 구조조정 부담을 떠안았고 면세와 유통 계열 역시 실적 압박이 커졌다. 화장품업계도 중국 의존도가 높았던 기업들을 중심으로 성장세가 둔화됐다. 이후 산업계에서는 “특정 시장 하나에 지나치게 기대는 구조는 위험하다”는 인식이 빠르게 퍼졌다. 기업들이 북미와 동남아 시장 확대, 온라인 채널 강화에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재계 흐름을 또 한 번 흔들었다. 항공과 호텔, 면세, 백화점 같은 오프라인 소비 업종은 직격탄을 맞았지만 플랫폼과 물류, IT 기업들은 오히려 몸집을 키웠다. 유통업계 변화는 시장 분위기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 가운데 하나다. 과거에는 백화점 점포 수가 경쟁력처럼 여겨졌지만 코로나 이후 소비 중심은 온라인과 모바일로 빠르게 이동했다. 쿠팡과 네이버 같은 플랫폼 기업들이 성장한 반면 기존 유통기업들은 뒤늦게 온라인 투자 확대에 나섰다.

 

시장 분위기도 달라졌다. “오프라인 자산이 많다고 강한 시대는 끝났다”는 말이 업계에서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실제 대기업들도 이후 물류와 디지털 전환 투자에 속도를 냈다. 반면 유통 중심 그룹들은 성장 정체와 수익성 부담이라는 과제를 동시에 떠안게 됐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에는 산업별 희비가 더욱 뚜렷해졌다.

 

국제 유가와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면서 정유업계는 사상 최대 수준의 실적을 냈지만 항공과 화학, 건설업계는 비용 부담이 커졌다. 건설업계는 레고랜드 사태 이후 급격한 자금시장 경색을 겪었다. 프로젝트파이낸싱(PF) 시장 불안이 커지면서 건설사들의 유동성 부담도 확대됐다. 이 무렵 재계 일각에서는 “이제는 매출보다 현금 흐름이 중요하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반대로 방산과 조선업은 전혀 다른 흐름을 탔다. 유럽과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군비 확대 움직임이 이어지면서 한국 방산기업들의 수출도 빠르게 늘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와 현대로템,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운 것도 이 시기다. 

 

반도체 업종은 탄탄대로를 달렸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메모리 경쟁력을 기반으로 글로벌 영향력을 키웠고 이후 AI와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 흐름까지 이어지면서 재계 중심축으로 더 깊숙이 들어왔다. 최근에는 HBM을 중심으로 한 AI 반도체 경쟁력이 단순 실적을 넘어 그룹 위상까지 좌우하는 흐름으로 번지고 있다. SK그룹 존재감이 더 커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런 변화와 맞물려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재계를 가장 크게 흔드는 또 다른 변수가 불거졌다. 바로 미국 공급망 정책 변화다. 미국 중심 공급망 체계가 강화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 LG에너지솔루션 등은 미국 현지 투자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시장 일각에서는 앞으로 재계 순위 변화 속도가 지금보다 더 빨라질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과거에는 유통과 건설, 내수 소비 산업이 재계를 움직였다면 이제는 AI 반도체와 방산, 조선, 배터리, 전력 인프라 같은 글로벌 공급망 산업이 시장 흐름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예전에는 백화점과 건설 현장이 한국 경제 성장의 상징처럼 여겨졌지만 최근에는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졌다”며 “AI 반도체 공장이나 조선소, 방산 분야처럼 실제 수출과 산업 경쟁력을 움직이는 업종들이 다시 중심으로 올라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에는 회사 규모 자체가 경쟁력이었다면 지금은 시장 변화에 얼마나 빨리 대응하고 사업 구조를 바꿀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해졌다”며 “재계 순위 역시 앞으로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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